우리 사람은 영혼육(Spirit Soul Body)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 가운데 다른 짐승이 가지고 있지 않은 영(Spirit)을 우리 사람들은 가지고 있다. 이 영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 코에 불어 넣으신 바로 그 호흡이다. 이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공통분모이며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 영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그런데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도 수 백년은 더 살았다. 물론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 하는 말씀속에는 육신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영의 죽음, 즉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래서 아담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교제의 장소였던 에덴 동산으로부터 추방이 된다. 우리 인간들도 원죄 가운데 태어나기 때문에 영은 생명력이 없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의 영은 새생명을 얻는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거듭난다", "중생한다", 또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다" 라는 표현을 쓴다.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금방 태어나면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유약해서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젖을 먹이고 이유식을 먹이며 특별한 관리를 하며 양육을 하다가 이제 어느 정도 자라서 단단한 음식을 먹을 정도가 되면 그 때서야 밥을 먹이기 시작한다. 그것과 마찬 가지로 이제 막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보면 금방 태어난 사람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이런 분들에게 양육 교육을 시킨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 3:2 에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하면서 이런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젖을 먹는 수준이란 영적으로 아직 유약하다는 의미인데 물론 이 부분을 절대적인 관점에서 영적으로 다시 태어난 지가 얼마되지 않았으니 아직 유약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함께 하던 혼과 육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다. 우리 사람은 영혼육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영은 이제 금방 태어났고 혼과 육은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던 것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경험, 지식, 패턴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그런데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이 된 것이라 할지라도 갖 태어난 영이 혼과 육을 잘 통제를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예수를 믿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경험, 고집 등에 묶여 있는 경우를 많이 보며 또 경험할 수가 있다. 그래서 어릴 때 믿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잘 받아드리고 그것을 삶 가운데 실천을 더 잘하는 이유도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 영이 육과 혼을 잘 통제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사람을 영의 사람(Spiritual man)이라고 칭한다. 영의 사람, 영적인 사람이 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육을 입고 있고 우리의 본성인 혼에 우리가 많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육은 어떠한가? 외적으로 보이고 만져 지는 우리의 몸을 말한다. 우리는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루에 세 끼를 먹고 또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자주 산보를 하기도 하고, 운동도 하고, 음식도 신경을 써서 먹고 마시는 물도 가려서 마신다. 어디가 조금 불편하기라도 하면 병원에 찾아가고 약을 먹는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서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혼은 어떠한가? 우리의 본성을 말한다. 짐승도 혼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 사람의 혼이 짐승과 틀리는 짐은 우리의 혼은 훈련을 받고 또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짐승은 본성대로 움직인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 않다. 물론 본성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학교에서 사회에서 훈련을 받는다. 아무리 배가 고프더라도 음식을 훔쳐 먹어서는 안된다.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합법적으로 이 세상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살아야 된다 등등 이런 훈련을 위해서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유치원, 대학, 심지어 대학원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과 혼은 늘 훈련을 받고 있고 나름대로 훈련이 잘 되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영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영역, 공통의 영역이라고 하는 영은 어떠한가? 이제 태어난 지가 얼마되지 않아서, 아니 태어난 지가 꽤 오래 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한 것인지도 잘 모를 때도 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체험해보지 못한 것도 별로 없는 경우도 있다. 이 상태로는 혼과 육을 절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우리의 혼과 육을 영이 잘 통제를 하려면 영도 훈련을 해야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혼과 육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을 싫어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가 입에 잘 올리는 아가페 사랑이다. 아가페 사랑이란 무조건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 이타적인 사랑,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그러한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의 혼과 육은 상대적인 사랑, 선별적인 사랑에 익숙해져 있다. 사랑할 사람은 사랑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것에 우리는 익숙이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축복하라고 하신다. 원수를 축복하는 것? 우리의 경험과 논리에 절대로 맞지 않는다. 원수를 미워하고 저주해야 하며 기회가 되면 확실하게 손을 봐줘야 하는게 원수다. 그런데 그 원수를 어떻게 축복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 편에 있는 영의 요구와 우리 편에 있는 혼과 육의 요구가 서로 부딛치게 되면 어느 것이 이길 것 같은가?
나의 경우에는 혼과 육의 요구가 이길 때가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이러한 사람을 육적인 사람이라고 성경에서는 분류한다. 나는 사실 영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데 말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 나의 영은 유약해서 영과 육이 싸우면 육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는 영이 승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영적인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도 훈련이 필요하다. 전투에 나가는 군인이 그 전투에서 승리를 하려면 필수적으로 감당해야 할 것이 훈련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무기를 잘 다룰 줄 알아야 하고 그 성능에 대한 확신도 가져야 하며 동시에 지휘관에 대한 신뢰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자기의 목숨을 걸고 그 명령에 절대 복종할 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도 우리의 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훈련이 되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도 알아야 하고 또 그 말씀에 얼마나 큰 권능이 있는지도 체험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우선권을 두는 자세가 우리 마음 가운데 확립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영과 육이 부딛칠 때는 전장에 임하는 군인이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고 싸우는 것처럼 우리도 자기의 생명을 내어놓고 싸우는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수행해야 할 영적인 전투가 아니겠는가? 우리의 생각, 경험, 논리, 삶의 방식 같은 것들은 이미 우리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하나님의 생각과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힘써 수행해야 할 영적 전투는 우리의 혼과 육을 우리의 영에 복종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믿음 생활이다. 그 곳에 바로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로마서 8: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