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5일 금요일

하나님의 형상회복: 롯(Lot)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은 우리 가운데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들을 회복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믿음 생활이기 때문이다. 믿음 생활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손상이 되어 있는 형상들을 우리가 어떻게 얼마큼 회복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은 롯의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까 한다.
롯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한 그의 조카이다. 하나님께서 롯에게도 물질적인 복을 허락하셔서 그 소유가 너무 많아 아브라함과 함께 지낼 수가 없어서 롯이 택한 곳이 소돔 지역이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물도 넉넉하고 초지도 넉넉하여 목축을 하며 지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은 유감스럽게도 죄악이 득실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나 극심해서 그곳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천사 두 명이 사람의 몸을 입고 소돔성으로 들어왔을 때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이 그들을 자기의 집으로 초청한다. 창세기 19장 2절에 보면 이들은 롯의 초청을 처음에는 거절하였다가 3절에 롯이 간청함으로 그의 초청에 응한다. 때로는 간청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계획을 롯에게 알리면서 롯으로 인하여 구원 받을 자의 범위를 말한다. 19장 12절에 보면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내라"고 말이다. 천사의 말에 의하면 롯이 성밖으로 이끌어내는 자들은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자, 그런데 롯은 몇 명의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었는가?
먼저 롯은 자기의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엄청난 사실을 말한다. 그랬을 때 자기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사위들에게 비춰진 롯의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천사가 롯이 빨리 이 성을 떠날 것을 재촉했을 때 롯이 계속 지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왜 지체했을까? 멸망이 코 앞에 다가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롯이 지체하는 이유는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중에 동굴에서 일어난 사건들로 미루어 볼 때 롯은 여러 가지 챙겨가야 할 것들이 있어서 지체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가 평소에 소중히 여기던 것들, 예를 들면, 땅 문서, 보석, 술 등이 아닐까 생각이 된다.
멸망이란 홀연히 다가온다. 소돔과 고모라 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천사들이 롯을 재촉한 것이다. 그래도 롯이 꾸물거리며 뭔가를 챙기고 있으니 그것을 보다 못해 나중에는 강권적으로 롯과 그 아내와 딸들을 성밖으로 이끌어 내는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때는 어떠할까? 우리가 맞이할 마지막 때는 죽는 것이나 이 세상의 종말, 두 가지 중에 먼저 오는 것이다. 개인적인 종말이 우리에게 먼저 올 경우에는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세상의 종말을 우리가 맞게 된다면?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상황이 얼마나 긴박할 것인가에 대해서 마태복음 24장 17~18절에서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마지막 때가 되면 우리도 롯이 한 행동과 별반 틀림이 없는 행동을 할 것 같다. 우리들도 롯처럼 가진 것이 많아서, 그리고 그것들에 미련이 남아서 그것들을 챙기느라 꾸물꾸물하면서 멸망을 스스로 자초하지나 않을까? 우리의 삶에 모습에 사랑이 결핍되고 거룩함이 나타나지 않아서 우리로 인하여 구원 받을 수 있는 자가 과연 누가 있을까? 마지막 심판때가 이제 코 앞에 다가왔으니 예수를 믿으라고 우리의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면 롯의 사위들은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는데 아마 우리의 경우는 우리 말을 듣는 자들이 코웃음을 치면서 당신이나 잘 믿으시요 할지도 모르겠다.
롯의 딸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온 세상이 멸망하는 것으로 알고 자기의 어버지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한다음 성적인 관계를 맺는다. 딸들이 어디서 이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피해 동굴에 숨어 있는 상황인데 그렇게 마실 술은 과연 어디에서 구했는가? 하나님의 멸망이 임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체하면서 술을 비롯한 세상 것들을 챙겨가지고 갔다.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미쳤는가? 큰 딸이 낳은 아들은 모압 족속을 이루었고 작은 딸이 낳은 아들은 암몬 족속을 이루었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과 계속적으로 적대관계를 유지한 족속들이 되었다. 시작이 이렇듯 무지하고 비인륜적이니 결말이 그러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롯과 그의 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계획에 너무나 무지했음을 알 수 있다.
노아의 경우에는 그의 가족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롯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다. 롯의 삶의 모습이 노아처럼 흠이 없는 자가 아니었다. 사랑으로, 그리고 거룩함으로 그의 삶이 채워지지 않았기에 사위들 조차도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삶이 그러한 믿음의 고백에 걸맞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우리의 삶의 모습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연 나타나지 않고 거룩한 삶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또한 어떤 결과를 나타낼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성경에 무지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개신교에서는 은혜 은혜하면서 은혜를 너무 강조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 것처럼 얘기를 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행위가 당연히 따라야 그 사람의 믿음이 진정한 것이 된다.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삶 가운데 실천하는 것은 고사하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고 사기치며 가혹하며 냉정하며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의도 없는 자들은 거짓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21~22절에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누가복음 6장 46절에서도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고 하시면서 49절에서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고 하셨고 47절에서 48절에서는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으로 말씀하셨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자들이라면 거기에 걸맞는 삶의 모습을 이 세상 가운데 나타내야 한다. 사랑을 세상 가운데 실천해야 하고 거룩한 삶의 모습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는 더욱 무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소식을 더욱 영향력있게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Southern Oregon의 설경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하얗게 쌓였다. 오레곤에 이렇게 눈이 자주 올 줄은 몰랐다. 여기 오기 전에 듣기로는 일년에 한 두 차례 온다고 그랬는데 기대했던 것보다는 꽤 자주 오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설경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게을러서 집 안에서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장면을 찍다보니 사진에 담기는 내용이 지난 번 눈(Snow)에 올린 사진과 별로 변함이 없어 보인다. 단지 눈이 조금 더 많이 쌓인 것을 제외하고는.
정면 가운데에 짐승이 다녀간 흔적이 있구나. 발자국을 보아서는 무슨 동물인지 모르지만 집 뒤편까지 왔다가는 다시 돌아갔는데 여러 마리 같다.
거위 여섯 마리가 물가에서 물구경을 하는지, 아니면 눈구경을 하는지, 아니면 지난 번에 우리 집 뒷 마당에서 한 마리가 화살을 맞는 바람에 내가 나오는지 아닌지를 주의깊에 보고 있는지... 그 사건 이후로 우리집 뒷 마당 깊숙히로는 들어오지 않는구나. 주로 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든지, 아니면 사진 앞 쪽으로 보이는 흙이 약간 들어난 부분 정도까지 와서 식사를 조금하는 정도.
우리 집 뒤 건너 편에 있는 집이 자주 등장하는구나. 언제 그 집 주인을 만나면 얘기해줘야 되겠다. 언덕에 활엽수들이 많이 있어서 여름이면 그 집조차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다.
우리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곳에서 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린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2011년 2월 24일 목요일

삶의 여유

오늘은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다. 일기예보를 통해서 오늘 눈이 올 것이라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이곳에 와서 이렇게 낮에 눈이 많이 내리는 것은 아마 오늘이 처음인 것 같다. 그렇지만 주변의 색깔로 인하여 참으로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내리는 눈은 하얗지만 그 눈을 맞이 하는 잔디, 소나무, 전나무, 그리고 불렉베리는 여전히 그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고 잔잔하게 그렇지만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흘러가는 강물도 그 푸르름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이럴 때는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는 난로 앞에 앉아서 차도 한 잔하고 떠오르는 시상을 적어보는 그러한 한가로움을 즐겨보는 것도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이 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여유를 즐기는 데는 아직 익숙하지가 않은 것 같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근 40여 년을 삶의 생활 현장에서 열심히 움직이던 관성이 아직 남아서 인지 뭔가 해야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이 있다. 내가 이러고 있어서 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며 무언가로부터 쫓기는 듯한 마음에 안절부절할 때도 있다. 나의 아내도, 나의 자녀들도 이제는 좀 쉴 여유를 가져야된다고 말을 하는데도, 그리고 그럴만한 자격도 충분이 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몇 주 전에 어머니와 전화를 통하면서 이러한 나의 마음을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렸다. 그랬더니 나의 어머니께서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쉬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시면서 학교에 다닐 때는 그렇게 학교에 가기 싫어하면서 노는 것을 즐기더니 이제는 정작 놀 때가 되었는데 왜 자유롭게 즐기면서 놀지 못하느냐고 되물으셨다. 그러고보니 옛날에 그러한 과거(?)가 상기되면서 그 때는 정말 놀기 좋아했는데 지금은 왜 이럴까 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지금까지 일을 해오던 관성과 괜한 미련 때문이 아닐까? 때로는 이러한 여유를 즐길 줄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자녀들의 말대로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하고 또 군대에서 예편하고나서는 목회자 생활도 열심히 했으니 이제는 여유를 좀 가져도 되지 않겠는가? 가족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는데 말이다. 여유를 가지자. 여유를 즐기자.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그를 송축함이 내 입에 계속하리로다" 시편 34:1

2011년 2월 22일 화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아브라함(2)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경우에 대해서 진행하고자 한다. 조카 롯에게 좋은 목초지를 양보해준 다음 아브라함에게 들려온 소식이 그의 조카가 네 명의 왕이 이끄는 군대에 사로잡혀 갔다는 것이다. 비록 그 당시 왕이란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자를 지칭하지만 명색이 4개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이다. 이러한 군대를 상대로 자기 조카 롯을 구하러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집에서 양성한 병사 318명을 인솔해서 그 군대를 따라잡아 야습을 통해서 그 군대를 격파하고 조카 롯을 구한다. 뿐만 아니라 사로잡혀 갔던 사람들과 재물을 다 찾아서 돌아온다. 아브라함의 심령 가운데 굳건히 자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소돔왕과의 대화에서도, 그리고 노획물을 처리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의 향취를 맡을 수가 있다. 소돔왕이 사로잡혀 갔던 사람들은 자기에게 돌려주고 물건은 아브라함이 다 가져도 좋다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절하고 소돔왕에게 속했던 모든 물건들을 돌려준다. 행여 아브라함이 저렇듯 부자가 된 것은 소돔왕의 재물로 인함이라는 소리는 전연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브라함이 부자가 된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이었다.
아브라함이 항상 선한 일, 완전무결한 일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사람이기에 실수도 있었다. 그가 도착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쉽사리 그 땅을 뒤로 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일과 그 때 자기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해서 문제가 발생되기도 했다. 애굽의 바로왕으로 하여금 큰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약속하셨던 아들이 태어날 기미가 전연 보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사라가 자기의 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대로 행한 것이 하나님께는 죄였지만 그러나 그 당시 시대적 관습에 보면 전연 죄가 될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라가 부탁하기도 전에 사라의 여종과 동침해서 사라의 가슴에 못을 받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점잖은 행위인가?
이웃 사랑, 나그네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태도도 참 아름답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라함이라면 족장이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기른 병사들도 상당수 있어서 그래도 힘께나 쓰는 분인데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절을 하고 강권하여 모셔들여서 대접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고 자기의 짐승 가운데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대접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가능한 일인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태도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이웃 사랑의 귀한 모델이다.
자기가 정성껏 대접해드린 손님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의 그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아브라함도 그 성들에 대한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터이다. 자기 조카도 소돔성에 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 그런 놈들은 다 멸망 받아야 당연하지 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중보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명의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면서 시작한 그의 중보가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가면서 계속된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누가 이러한 방법으로 중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잘 아는 지식으로 무장된 사람, 그리고 비록 악인들이지만 그 영혼들이 귀중한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아브라함의 중보도 하나님을 대단히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22장에 들어가면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가? 그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무슨 소풍 가는 것도 아니고 등산 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엄청난 부담과 고통을 안고 가는 길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이겨내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다. 그랬을 때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과 지식의 극치이다.  사랑과 지식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대단한 결심과 결단이 요구되는 행위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쉽사리 하나님의 명령을 밥먹듯 이행하지 않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너무 쉽사리 거짓말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망령되게 입에 올리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의를 회복 받은 자, 영이 구원함을 받은 자 다운 삶의 모습을 우리는 갖추고 있는가?
나의 생각과 경험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고 뭐고 없는 우리의 오만불손한 언행을 보시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그것도 표면적으로는 전부 하나님의 뜻, 교회를 위하여 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사리사욕과 고집을 관철시키려는 행동을 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입은 살아있는데 믿음의 행위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 이웃 사랑, 거룩한 삶의 모습,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식을 완성해가는 모습을 우리도 정말 닮아가야 한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진정한 믿음이다. 말로만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자신과의 처절한 영적 전투를 통해서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래야 만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 22:18

2011년 2월 21일 월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아브라함(1)

지난 블로그에는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예로 노아의 경우를 들었다. 이번에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알아보자. 아브라함의 경우, 그의 가정적 환경이나 그가 살았던 주변 환경은 그야말로 믿음의 조상이 되기에는 부적합한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구원받은 자의 반열에 설 수 있는 것도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아브라함의 경우도 갈대아 우르라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회에서 자랐고 그의 아버지가 우상을 만들어서 팔아서 생계를 꾸려가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과는 정말 거리가 먼 그러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러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가 75세였다. 아브라함이 받은 명령이 창세기 12장 1절에 기록이 되어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또 그 명령을 이행하는 관계, 즉 하나님과 교통하는 관계에 있음을 볼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회복받았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하는 말씀에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의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판단해주시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판결을 받은 아브라함이 거기에 걸맞는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아브라함의 몫이다. 유감스럽게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에서 실패한다. 믿는다고 입으로는 얘기하는데 그들의 삶의 모습은 전연 그렇지 않은 경우이다.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연 동떨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령을 내리셨다. 그 다음 차례는 무엇인가?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공이 넘어간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고 하지 않고는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 결정을 해야한다. 이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나 되었다. 이 정도 나이이면 이제는 타향에 있다가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시점이다. 그래서 고향 땅에서 친척들과 함께 여생을 보내며 뼈라도 고향땅에 묻어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나이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날 것을 명령 받고 그 말씀대로 이행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은하나님의 명령을 지상 최대의 것으로 알아서 시행할 수 있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소위 믿음장이라고 불리우는 히브리서 11장 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고 그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넘어온 공을 그야말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처리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가도록 지시하신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었다. 아브라함이 그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한 행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이었다. 하나님을 그의 중심에 확실히 모시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러한 일을 행동에 옮기는 일에도 부지런하였다.
하란땅에서부터 아브라함과 동행했던 조카 롯과 목축지 문제로 인하여 다툼이 일어났을 때에 그가 보여준 행동이 무엇이었는가? 자기 조카에게 절대적으로 양보하는 것이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을 대단히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 그 때  롯이 택한 요단 들은 여호와의 동산 같았고 애굽땅과 같았다고 창세기 13장 10절에 기록이 되어 있다. 아브라함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겠는가? 목축을 하는 사람이 물이 많고 목초지가 많은 땅이 왜 눈에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양보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결정을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기쁘게 받으셨는지는 창세기 13장 14절에서 17절에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그에게 주실 복을 다시 한 번더 확인해주셨다. 거기에 대한 화답으로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회복받은 자답게 하나님을 향한 전폭적인 믿음을 보이며 살아가는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진다. 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로는 하면서 그 믿음의 증거가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계속)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2011년 2월 20일 일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노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인생 여정을 살아가면서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만큼 잘 회복하느냐가 믿음 생활의 성패를 좌우한다. 대표적인 성공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노아이다. 그의 삶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믿었고 또 하나님을 믿는 자답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을 성심을 다해서 행하였다. 이 부분이 사실 대단히 중요하다. 믿는 자라면 믿음의 증거들을 삶 가운데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다.
노아의 경우는 창세기 6장 8절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 말씀은 노아의 의가 회복이 되어 하나님과 교제를 할 수 있는 자라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시작되며 하나님 만이 회복시키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이고 또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의를 노아는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 받은 자임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창세기 6장 9절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삶을 보면 비난 받을 만한 것이 없었다는 얘기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자 다운 삶을 살았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니다.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죄가 가득한 그 당시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피나는 그의 노력이 수반이 되었다는 말이다. 노아의 심령 가운데 손상되었던 거룩함이 많이 회복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지을 것을 명령하셨다. 그것도 산 꼭대기에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약 120여 년이 걸린 엄청난 작업이었다.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며 주변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의 결과로 마침내 완성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노아의 절대적인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사역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역이 바로 하나님께로 향한 노아의 뜨거운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 그 물로부터 구원함을 받기 위해서 사용되어질 도구가 바로 방주이다. 이러한 방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지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고 그것을 그대로 잘 이행하였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노아는 각종 동물들을 다 기억하였고 그들의 먹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기르는 지에 대한 지식도 구비하고 그것을 그대로 준비하고 이행한 것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물론 시시때때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었으면 어떻게 이 일을 다 감당할 수가 있었겠는가?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성공적으로 감당하였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세 며느리가 이 일에 순종한 것을 보면 노아는 그의 가족들을 사랑했으며 그의 가족들이 보기에도 바른 삶, 거룩한 삶, 존경받을 만한 삶을 살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가족의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노아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구원의 범주에 포함된 사람들과 짐승들을 구원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대단히 귀한 분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고 말로만 끝낼 것이 아니라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다운 삶,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다운 삶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 향한 우리의 사랑을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하며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과의 사랑을 또한 실천해야 한다. 또한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과 소금의 역할, 즉 거룩함을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 넓혀가야한다. 우리 가운데 손상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회복하면 회복할 수록 더욱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께 온전한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릴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세기 6:22

2011년 2월 19일 토요일

집안 페인팅을 우리가 다 하다니!

2011년 2월 18일 금요일에 부부가 힘을 합해서 근 열흘에 걸쳐 집안 내부 페인팅 작업을 끝냈다. 대견하게 생각이 된다. 생전 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책을 보며 인터넷을 찾아 보면서 마무리지었다.
우리 집 내부는 천정은 Pop Corn으로 되어 있고 벽은 Knock Down식으로 처리되어 있고 Semi gloss로 되어 있다. 다 특수 처리가 되어 있어서 우리 같은 초보자들이 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았다. 벽이 Knock Down식이어서 표면이 오들도들하게(사투리인가?) 되어 있다. 꼼꼼하게 하지 않으면 페인트가 입히지 않는 부분이 생기고 또 표면적이 넓으니 당연히 페인트도 많이 소모가 된다. 그리고 약간 매끄럽고 광택이 나도록 되어 있으니 보기에는 좋으나 페인트가 잘 묻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처음 시도한 장소가 부엌인데 아마 서너번은 칠한 것 같다. 처음 페인트를 해놓고 보니 얼룩 덜룩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페인트을 전문으로 하는 어느 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 보니 몇 가지 것을 얘기해줬다. 그 분이 얘기한 것과 우리가 책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롤러는 양털로 만든 것을 사용할 것,
그리고 털을 포함해서 폭신폭신한 부분의 두께가 3/4인치가 되는 것을 쓸 것,
커텐, 부착물 등을 제거하고 못구멍, 파손된 부분 등을 떼우고(Patching) 표면을 매끄럽게(Sanding) 한다음 따뜻한 물에 세제를 풀어서 벽을 깨끗하게 닦아낼 것,
그 다음, 페인트가 닿으면 되지 않는 부분을 Taping을 할 것 등이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한 사람은 큰 롤러를 가지고 W 또는 M자로 칠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작은 롤러와 붓을 가지고 큰 롤러가 닿지 않는 부분에 페인팅을 했다. 일차 페인팅이 끝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두 번째 페인팅을 했다. 그랬더니 초보자들이 칠한 것 치고는 꽤 괜찮은 작품이 나왔다.
근데 페인팅을 다하고 나서야 페인팅하기 전의 벽을 Before로 사용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 이런데 익숙하지가 않아서 뭔가 빠뜨리는 것이 꽤있다.
아무튼 대단한 인내력을 가지고 페인팅 작업을 마무리했다.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니까 쉽게 얘기하면 이게 바로 기압의 일종이다. 군대에서 기압 주는 것이 무엇인가? 팔굽혀펴기, 쪼그려뛰기 등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시키는 것이 아닌가? 페인팅을 하기 위해서 롤러와 붓을 가지고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면서 드디어 페인팅을 완료했다.

아래 사진이 Kitchen에 사용한 것인데 BlueGray색이면서 Semi Gloss로 되어 있다. 이 사진은 실제보다 더 진하게 보이지만 그런대로 나온 것같다.
 
Guest Bathroom에도 처음에는 위의 것과 같은 색으로 페인팅을 했는데 작은 공간이고 창문이 작은 것 하나가 있다보니 약간 어두운 기분이 든다면서 아내가 Creative Idea를 내서 Blue Gray에 흰색을 섞은 것으로 덧입혀서 페인팅을 했다. 아주 그럴듯하게 보인다. 사진을 몇 장 찍었지만 도저히 근처에도 가지 않아서 사진을 올리지 않았다.
Family Room과 Hall Way, 그리고 Guest Room은 같은 BlueGray이면서 Eggshell(광택이 별로 없는것)로 페인팅이 되어 있다.
Master Bathroom과 Utility Room은 연초록빛 색이면서 Semi Gloss로 페인팅 되어 있다.
Master Bedroom과 Living Room은 연초록빛 색에 Eggshell로 되어 있다.
집안 내부도 이렇게 새롭게 단장을 하고 나니까 참 깨끗하게 느껴지고 살 맛이 난다. 우리의 마음도 이렇게 한 번 단장을 해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성령님께서 계실 만하도록 했으면 하는 바램도 해본다. 그리고 신경질 한 번 내지 않고 일을 잘 끝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을 잘 맞추어준 아내에게도 감사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2011년 2월 18일 금요일

눈(Snow)

어릴 때는 눈이 오면 왜 그렇게 좋았을까? 추운 줄도 모르고 밖에 나가서 눈에 뒹굴고 떠들고 웃고 장난치고...
그러던 눈이였었는데 군대에서 제설작업하면서 눈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강원도 방산 일대에서 소대장을 하면서 겨울에 눈을 치우는 것이 중요한 일과중에 하나였다. 눈은 왜 그렇게 많이 오는지. 군사 작전 도로는 항상 사용 가능한 상태로 유지가 되어 있어야 되기 때문에 눈이 오면 각 부대별로 제설을 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눈이 많이 올때는 눈을 한참을 치우고 뒤돌아보면 제설 작업을 한 지역에 또 다시 눈에 하얗게 쌓여 있다. 하루 종일 제설 작업에 눈이 원망스럽게 생각될 때도 있었다.
최근 미네소타에서 2년반 가까이 살면서 그곳 특유의 눈을 경험했다. 아주 추운 지역이고 또  눈도 많이 오는 지역이라 눈을 치우는 시스템은 잘 되어 있었다. 근데 견디기 어려운 것은 주변이 온통 회색빛이라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 보아도 전부 히끄므레한 빛깔을 띄고 있다. 하늘도, 땅도, 호수도, 주변 건물도... 사람들의 얼굴조차도 그렇게 보일 때가 있다. 그것도 일년의 반 가까이가 그러니 그것이 너무 싫어서 이곳을 떠나게 되면 햇볕이 많은 지역으로 가자고 해서 온 곳이 오래곤 남서쪽 지역이다.
그런데 이곳에도 2011년 2월 17일 아침에 일어나니 뒷 마당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일기 예보를 통해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곳의 눈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야 말로 어쩌다 한 번 오는 눈이고 또 눈이 쌓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색깔이 있다. 뒷마당과 동네 뒷 산에 보니는 하얀 눈, 푸른 침엽수, 나무 밑에 파랗게 자태를 뽐내고 있는 잔디들, 눈에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곧추 세우고 있는 Blackberry들,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 등 여전히 갖가지 색깔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각양 각색의 모양과 환경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우리 인간들의 무지와 무책임으로 이 세상이 많이 손상이 되었어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하나님께서 처음 이 세상을 지었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세기 1:31

2011년 2월 17일 목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결론

지금까지 하나님의 형상인 의와 사랑과 지식과 거룩함에 대해서 말했는데 여기서 결론을 맺을까 한다. 먼저 의는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만이 회복이 된다. 의가 회복이 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 때문에 기도하며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사랑, 지식, 거룩함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여 가꾸어 나가야 할 것들이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점점 회복되어 나간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100% 완전하게 회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완전한 회복은 우리의 육신을 벗고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날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정말 엄청난 댓가를 지불하시면서까지 우리 가운데 있는 손상이 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려고 하시는 목적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분이 사단의 종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신부로 변화가 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단한 변화이다.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우리 스스로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 가운데 있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일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워주셨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신부로 세움을 받았으니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부답게 살아가는 몫은 우리의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이 바로 사랑을 회복해가는 삶, 지식을 회복해가는 삶, 거룩함을 회복해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자, 예수님의 신부다운 자가 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말로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엉터리 그리스도인이 아닌, 실제로 그리스도인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예수님의 신부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4:11

2011년 2월 16일 수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지식과 거룩함의 회복

그 다음 topic은 지식과 거룩함의 회복이다. 먼저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몫은 성경을 많이 읽고 배우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배울 때는 늘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골로새서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채움을 받아야 한다. 세상적인 지식만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지식이 회복이 되어야 하나님의 뜻을 또한 바르게 인식할 수가 있다. 요즘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을 회복하기 위해서 더욱 많은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한다. 얇은 지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뜻 하면서 떠들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전부 자기의 생각 범위 안의 것들임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뜻도 자기의 뜻과 맞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아직 지식이 회복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지식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지식의 회복을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 생활을 더욱 열심히 해야하고 동시에 성경을 많이 읽고 배워야 한다.
거룩함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함이란 바른 삶, 성결한 삶을 말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16에서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다. 그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 인간들도 당연히 거룩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마찬 가지로 우리도 거룩할 것을 명령하신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 거룩한 삶이다. 입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삶의 모습은 짐승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고 거룩하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자라고 하면서 거짓말은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고 사기치고 매정하고 위선적인 모습을 보고 아무도 거룩하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로 거룩한 삶이다.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우리의 몫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2011년 2월 15일 화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사랑의 회복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에 회복이 되지만 다른 형상들, 사랑, 지식, 거룩함 등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심령 가운데 함께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가 회복해나가야 된다.
먼저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두 가지 큰 계명을 주셨다. 계명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힘써 지켜야 될 주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믿음과 노력(행위)의 문제가 발생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나의 주님(Lord)이시요 나의 그리스도(Christ)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심을 우리의 입으로 고백한다. 여기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나는 그의 종(Servant)이 된다. 주종관계가 성립됨을 내 스스로가 고백한 것이 된다. 그 주종관계가 온전히 성립이 되려면 주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해야한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진정으로 믿는 증거를 어디서 찾아볼 수가 있는가? 그의 말씀을 우리의 삶 가운데 지키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노력하는가 하지 않는가로 구별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의 말씀을 삶 가운데 지키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다. 사실,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 세상에는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는 것 같다.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정작 우리의 주님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연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로는 눈곱 만큼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고난의 피로 우리가 의로운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판정을 받았으면 우리의 그리스도시요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가운데 힘써 실천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믿음이란 말로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거기에 걸맞는 행위가 따라야만이 그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다. 서론이 좀 길었는데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가만히 앉아서 입으로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회복을 위해서 우리가 행위로 옮겨야 할 말씀은 마태복음 22:37 에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며 그리고 마태복음 22:39 말씀인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기적이고 상대적인 우리의 본성과는 너무 동떨어진 말씀들이라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께서 이 말씀들을 가장 큰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의 종들인 우리가 지키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십니다 하는 고백이 거짓임이 들어난다. 우리 모두 열심히 노력하자.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1서 3:23

2011년 2월 14일 월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의의 회복

“의(Righteousness)”의 회복을 가장 먼저 다루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기에 죄의 흔적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우리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었기에 당연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 그리고 죄인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방법도 또한 없다. 크고 작은 죄들을 끊임없이 지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기에 우리의 힘으로는 이 죄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이러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과 완전한 단절을 원하지는 않으셨기에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해결 방법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의 피로 우리 인간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예표로, 모델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다. 구약 시대에는 흠이 없는 어린 양이 속죄 제물로 사용되었는데, 이 어린 양의 역할을 예수님이 감당하신다는 말이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피 만이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의의 회복을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다 망가져서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의가 온전히 회복이 되어서 그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도 드릴 수 있고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죄성을 하나님께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의의 회복은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만이 회복된다는 것을 로마서 3장 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증거하고 있다.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순간에 회복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한이 없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사단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신다. 할렐루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3:22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서론)

인간(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처음 지음을 받았을 때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으로 무장이 되었고 하나님의 지혜를 닮아서 아담은 성경 공부도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알았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새와 짐승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죄가 없었어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하나님과  서로 대화를 나누며 교제를 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처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어떠한가? 조그마한 사랑, 조그마한 지혜, 때로는 선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도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형상과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 왜 그런가?
바로 죄라는 존재가 우리 심령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죄는 우리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우리 가운데 들어왔고 그것이 또한 우리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더럽혀 버렸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고 하나님과는 적대 관계, 원수 관계가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니 당연히 사람들과의 관계도 무너졌다. 처음으로 나타난 현상이 형인 가인이 동생인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형이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살인 사건의 원인이 무엇인가? 두 형제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인 아벨의 예배는 받으시고 형인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다. 이 일로 인하여 형인 가인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불꽃이 타올랐다. 사랑이 자리해야 할 곳에 시기와 질투가 자리하니 그것이 동생을 죽이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 인간 세상은 거짓이 참이 되고, 하나님이 지으신 좋은 세상을 더럽히고 착취하며, 이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대신에 때로는 짐승과 태양과 나무와 돌 등을 숭배하고 경배하게 되었다.
사단에 대하여는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죄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더럽혀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이 되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에는 사랑, 지식, , 거룩함 등이 있는데 이러한 형상을 어떻게 회복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하나씩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려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26

2011년 2월 7일 월요일

Vinyl Wondows 교체

이 집에 이사오면서 가능하면 모든 일을 우리 스스로 하자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첫번째가 창문을 교체하는 것이었다. 이 집 창문 Frame이 전부 알루미늄으로 되어 있고 또 double pane이기는 한데 얇은 것들이어서 에너지 유출이 많다고 판단되어서 교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창문들 사이즈가 커서 혼자서는 도저히 설치가 불가능하고, 내 파트너는 허리가 약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Contractor와 Lowe's 두 군데에 Estimate를 받아 보았다. 창문 13개, Patio Door 1개, 재료비와 설치비를 Contractor는 $5,700요구를 했고, Lowe's는 $6,500을 요구했다.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비싸게 생각이 되어서 PARR Lumber라는 창문을 포함해서 각종 건축 자재들을 취급하는 도매상에 가서 창문 가격을 알아 보았더니 견적이 $1,980이 나왔다. 그래서 창문은 그곳에다 주문을 하고 설치할 사람만 구하기로 했다.
PARR에 얘기를 해서 창문을 설치할 만한 Contrctor 인적 사항을 받아서 그 가운데 두 사람으로부터 견적서를 받았다. 한 사람은 $1,650, 또 다른 한 사람은 $1,850을 요구했다. 그래서 당연히 비용이 적은 쪽을 택해서 공사를 시작했다. 인상도 좋고 이름도 Paul이라라 마음에 들어서다. 막상 일을 시작했는데 시원스럽게 말은 잘하는 것 같았지만 손이 섬세하지 못했다. 말로는 곧장 자기 칭찬을 해가면서 다른 사람들은 창문 교체를 할 때, 창문 Trim 외곽, 그리고 Trim과 창문 사이에 Caulking을 하지 않지만 나는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Siding 홈으로 벌레들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의 고객들은 자기가 일을 하고 있는 동안도 물론 좋아하지만 떠나고 나서 더욱 좋아한다. 왜냐하면 뒷정리를 잘하기 때문이다. 등등. 그런데 약간 실망스러웠던 점은 실제 작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Caulking을 창문 옆부분만 하길래, 내가 재차 당신이 창문 위 아래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면서 작업 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 때는 또 말을 바꾸어서 Caulking은 주로 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창문 아래 부분과 윗부분은 할 필요가 없단다. 그리고 Patio Door의 경우에도 작업이 다 끝난다음 Hidden Charge를 요구했다. 내가 그 사람들과 영어로 싸워서 이길 수도 없고 이 문제 때문에 Court에 갈 수도 없고 해서 요구하는 대로 $150을 더 주고 끝냈다. 그리고 그 양반이 떠나고 나서 집 주위를 둘러보니 아니나 다를까 눈에 보이는 부분은 그런대로 뒷정리를 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정리가 전연 되어 있지 않았다. 뭔가 모르게 뒷 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다음에 혹시 이런 기회가 있으면 좀 더 세부적으로 Contract에 명시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바깥 부분 Trim에 대한 페인팅은 높은 사다리를 이용해서 해야 되는 세 군데 만 그 사람이 하고 나머지는 시간당 $50을 더 내야된다고 하는 바람에 우리가 했다. 기분은 약간 찜찜했지만 우리 집을 우리 손으로 단장하는 또 다른 맛을 느끼며 기쁜 마음으로 일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우리 손으로 할 수 있는 부분만 조금씩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창문을 교체하고 나니까 바람은 확실히 덜 들어오는 것같고 (기분문제인지 모르지만), 고속도로로부터 들려오는 소음도 약간은 줄어든 것 같다.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2011년 2월 5일 토요일

다슬기 구출작전

참으로 아름다운 날씨를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먼저 찬양을 드린다. 지금까지 연어와 가재와 게와 조개, 그리고 거위를 잡아 먹었던 내용들에 대해서 글을 썼는데 오늘은 조금 다른 측면에서 글을 쓰려고 한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다슬기(경상도에서는 꼴부리라고도 부름) 구출 작전에 대해서이다. 몇 주 전에 내린 비로 물이 불었다가 이제 물이 줄어들면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모래턱에 갇혀 있는 다슬기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놈들을 잡아서 삶아 먹을까 생각했었는데 마음을 바꿔서 요번에는 이들을 구출해주기로 작정을 했다. 이 구출작전에 주로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은 아내이다. 아무래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동정심도 더 많고 이런 일을 더 잘하나 보다. 물은 아주 차갑지만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이런 일을 할 만한 정도였다.


나는 옆에서 열심히 낚싯대를 던졌지만 아무런 소득은 없었다. 기분좋게 그리고 행복하게 보낸 토요일 오후였다.
왼쪽 사진은 물로 다시 돌려보낸 다슬기들.
건강하게 잘들 살거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2011년 2월 4일 금요일

푸아그라

우리 아들은 간 요리하면 생각나는 것이 삶아서 소금에 찍어 먹는 것 정도가 생각 나는 모양이다. 부모들의 수준이 그 정도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요리에 조금은 감각이 있고 해서 그런지 이런 저런 것 아는 것은 많다. 집에 와 있을 때 어쩌다 신이 나면 요리를 하나씩 만드는데 꽤 잘만든다.
그 아들이 거위를 잡았다는 소식을 블로그에서 보고는 전화를 했다. 왠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전화를 잘 하지 않는 스타일인데 말이다. 그저 무소식을 희소식으로 알고 있는데 전화해서 하는 말, 거위 간을 요리답게 해서 드시라는 것이다.
그때 추천해준 것이 푸아그라? 어감이 어째 비아그라? 하고 비슷하군. 거위 간에는 영양소도 많다는 얘기를 아내가 아들에게서 듣고는 아들에게 하는 말, "아빠한테만 주지 말고 나랑 나누어 먹어야되겠네"
어쨌든 이 요리는 프랑스에서는 대단히 인기가 있는 것인 모양이다. 거위 간이 귀해서 그냥 Appetite정도로 먹고 끝내는 수준이란다. 거기다가 집에서 간을 크게 하기 위해서 불균형한 사료를 먹고 자란 것도 아니고 야생 거위이니 거기에 걸맞는 요리를 해서 먹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부랴부랴 아내가 인터넷을 뒤지고 해서 만든 요리가 바로 이것!



이게 그래도 세계 3대 요리 가운데 하나란다. 3대요리가 거위 간으로 만든 푸아그라, 송로버섯, 이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송이버섯은 알겠는데 말이다. 그리고 상어 알로 만든 캐비아.
거위 간을 깨끗하게 손질을 해서 양파, 파인애플 쥬스, 꿀, 버터, 와인 조금해서 구운 것.
빵 한쪽에다 가볍게 올려놓고, 거기에다 파인애플을 곁들여 먹는 맛이란!!!

근데 음식 수준에 걸맞게 냅킨, 포크 등도 좀 맞췄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 음식은 이미 다 먹어 치웠버렸으니 사진을 다시 찍을 수도 없고. 접시만 찍어랬드니...아내의 핀잔.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13

2011년 2월 3일 목요일

Roast Goose

어제 잡은 거위를 roast해서 먹기로 결정하고 여러 가지 준비하고 요리를 했다. 먼저 뱃속에는 양파, 마늘, 당근, 말린 사과, Cranberry, 호도 등을 넣고 약 네 시간 오븐에다 넣었다가 꺼내서 식탁위에 올려 놓았다.


오늘이 구정인데 우리 좋으신 하나님께서 특별한 음식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줄로 생각하고 감사드렸다. BomChul, 그리고 Jae와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근데 막상 고기를 먹어보니 여러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먼저 닭종류처럼 고기가 희지 않고 붉다. 그리고 지금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어서 그런지 상당히 말라 있고, 사진에는 통통하게 보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고기도 약간 질기다. TMJ Joint도 시원치 않은 아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만 먹고 들통에다 넣고 고기가 허물 허물해질 정도로 푹 끓여서 먹기로 마음을 먹었다. 때로는 한국식이 참 좋게 느껴진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한 곳에 다 넣어서 끓이는거야. 그리고 먹는거야, 그냥.
이곳에 와서 여러 가지 특별한 경험을 해본다. 그러다보니 은퇴한 사람들이 느낀다는 허전함, 우울증 등을 쉽게 극복해나가는 것 같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4:1

2011년 2월 2일 수요일

Wild Goose Hunting

오늘 뒷 마당에서 Canada Goose를 한 마리 잡았다. 나의 아버지는 사냥을 무척이나 좋아하셔서 나도 어릴 때 꿈 가운데 하나가 나중에 크면 아버지처럼 되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여름에는 낚시, 겨울에는 사냥을 하는 것이 내 눈에 무척 부럽게 여겨졌나보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기회를 별로 갖지 못했다. 낚시는 어쩌다 한 번씩 했지만 사냥은 별로 기회가 없었다. 그러던 참에 오늘 저녁 무렵에 뒷 마당에 날라든 거위가 눈에 띄여서 활로 잡았다. 첫 화살은 약간 빗나가서 털만 공중에 날렸는데 두 번째 화살은 명중했다. 거리는 약 20~25야드, Deck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쏘았는데, 그것도 아내가 보는 앞에서, 멋지게 명중을 했다. 내 마음 속에 잠재해있던 야성미가 되살아나는 기분을 느꼈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잡았으니 이것을 처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다 손질해놓은 것을 사서 먹던 사람들이라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서 왔다갔다 하다가 어릴 때 어른들이 닭을 잡아서 손질하던 기억을 되살려서 물을 끓이고 그 물에 담갔다가 털을 뽑는 것이다. 그런데 들통이 큰 것이 없어서 한 번은 머리부분부터 넣었다가, 그 다음에는 꽁지부분을 넣었다가를 반복하다가 겨우 털을 뽑았다. 나름대로 잘 뽑았다고 생각했는데 밝은 곳에서 보니 아직 잔털들이 꽤 남아있다. 그래서 아내가 인터넷에서 본 것 가운데 잔털을 제거하는 방법을 실습하기로 했다.  신문지에 싸서 불을 붙여서 태우는 것이었다. 그럴듯한 방법이라고 생각이 된다. 초짜들이 애를 써서 겨우 손질을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요리를 해서 먹는 것인데, 아내도 거위 요리는 처음인지라, 인터넷에서 그럴듯한 레시피를 하나 찾아서 지금 준비중에 있다. 보통 요리 솜씨가 아니니 잔뜩 기대가 된다.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