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2일 화요일

하나님의 형상 회복: 아브라함(2)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경우에 대해서 진행하고자 한다. 조카 롯에게 좋은 목초지를 양보해준 다음 아브라함에게 들려온 소식이 그의 조카가 네 명의 왕이 이끄는 군대에 사로잡혀 갔다는 것이다. 비록 그 당시 왕이란 도시국가를 다스리는 자를 지칭하지만 명색이 4개국으로 구성된 연합군이다. 이러한 군대를 상대로 자기 조카 롯을 구하러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가 집에서 양성한 병사 318명을 인솔해서 그 군대를 따라잡아 야습을 통해서 그 군대를 격파하고 조카 롯을 구한다. 뿐만 아니라 사로잡혀 갔던 사람들과 재물을 다 찾아서 돌아온다. 아브라함의 심령 가운데 굳건히 자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만난 소돔왕과의 대화에서도, 그리고 노획물을 처리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자의 향취를 맡을 수가 있다. 소돔왕이 사로잡혀 갔던 사람들은 자기에게 돌려주고 물건은 아브라함이 다 가져도 좋다고 말했을 때 아브라함은 그것을 거절하고 소돔왕에게 속했던 모든 물건들을 돌려준다. 행여 아브라함이 저렇듯 부자가 된 것은 소돔왕의 재물로 인함이라는 소리는 전연 듣고 싶지 않아서이다. 아브라함이 부자가 된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나타내고 싶은 것이 아브라함의 마음이었다.
아브라함이 항상 선한 일, 완전무결한 일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도 사람이기에 실수도 있었다. 그가 도착한 가나안 땅에 기근이 발생했을 때 쉽사리 그 땅을 뒤로 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일과 그 때 자기의 아내 사라를 여동생이라고 해서 문제가 발생되기도 했다. 애굽의 바로왕으로 하여금 큰 죄를 지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마고 약속하셨던 아들이 태어날 기미가 전연 보이지 않았던 상황에서 사라가 자기의 종인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면서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한다. 아브라함이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더 기다리지 않고 인간적인 방법대로 행한 것이 하나님께는 죄였지만 그러나 그 당시 시대적 관습에 보면 전연 죄가 될 것도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라가 부탁하기도 전에 사라의 여종과 동침해서 사라의 가슴에 못을 받는 행위를 하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점잖은 행위인가?
이웃 사랑, 나그네 사랑을 실천하는 그의 태도도 참 아름답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브라함이라면 족장이요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고, 자기가 기른 병사들도 상당수 있어서 그래도 힘께나 쓰는 분인데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절을 하고 강권하여 모셔들여서 대접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분이란 생각이 든다. 고운 가루를 가지고 떡을 만들고 자기의 짐승 가운데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 대접한다. 이것이 나에게는 가능한 일인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태도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이웃 사랑의 귀한 모델이다.
자기가 정성껏 대접해드린 손님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의 그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아브라함도 그 성들에 대한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터이다. 자기 조카도 소돔성에 살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당연한 일이지, 그런 놈들은 다 멸망 받아야 당연하지 하는 태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 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중보의 노력을 계속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성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곳을 멸하시고 그 50명의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면서 시작한 그의 중보가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가면서 계속된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누가 이러한 방법으로 중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잘 아는 지식으로 무장된 사람, 그리고 비록 악인들이지만 그 영혼들이 귀중한 것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야말로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아브라함의 중보도 하나님을 대단히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창세기 22장에 들어가면 아브라함이 백 세나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것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 이 명령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이 한 행동이 무엇이었는가? 그 다음 날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모리아 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무슨 소풍 가는 것도 아니고 등산 가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엄청난 부담과 고통을 안고 가는 길이었지만 아브라함은 그것을 이겨내고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다. 그랬을 때 창세기 2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내가 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과 지식의 극치이다.  사랑과 지식은 이론적으로 아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쉽게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다. 대단한 결심과 결단이 요구되는 행위들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너무 쉽사리 하나님의 명령을 밥먹듯 이행하지 않는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한가? 너무 쉽사리 거짓말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 망령되게 입에 올리는 우리의 모습 속에서 과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우리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볼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의를 회복 받은 자, 영이 구원함을 받은 자 다운 삶의 모습을 우리는 갖추고 있는가?
나의 생각과 경험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이고 뭐고 없는 우리의 오만불손한 언행을 보시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그것도 표면적으로는 전부 하나님의 뜻, 교회를 위하여 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사리사욕과 고집을 관철시키려는 행동을 보고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
입은 살아있는데 믿음의 행위는 정말 찾아보기 힘든 우리의 삶의 모습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 보여준 하나님께로 향한 사랑, 이웃 사랑, 거룩한 삶의 모습,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식을 완성해가는 모습을 우리도 정말 닮아가야 한다. 그러한 삶의 자세가 진정한 믿음이다. 말로만 믿는다고 다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 자신과의 처절한 영적 전투를 통해서 믿음의 행위를 나타내 보여야 한다. 그래야 만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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